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멩겔레 (문단 편집) == 그에 대한 말들 == > 나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는 누군가를 괴롭혀 본 적이 없었다. > 나는 단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안 그랬으면 나도 아우슈비츠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었을지 모른다. > 개인적으로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고, 상해를 가하거나 신체상으로 해를 입힌 적도 없었다. > 나는 수용소에서 많은 환자들을 도왔지만 나의 이런 선행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건강한 실험용 쥐로 쓰려고 쌍둥이 아이들에게 좋은 음식을 주고 좋은 옷을 입혔다.) > 전선의 군의관도 선별을 해야만 한다. 그것은 불가피한 수술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이를 통해서 부상자들의 생과 사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노동력이 있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해서 선별 작업을 했다. > 어느 나라이든 전시에는 그 나라에 위험이 되는 인사들, 태업 혐의를 받는 외국인들, 스파이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쓸모없는 인간들, 창녀, 집시와 직업적 범죄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운영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 나는 내 근무 기간 동안 나의 동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여러 번 전임 및 파견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마지막 전임 명령을 받았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게 되는지, 어떤 부대로 배치되는지 알지 못했다. > 나의 유일한 아들아, 나에 관해서 쓴 내용을 네가 어느 정도 믿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다오! 내 어머니에게 맹세컨대 나는 결코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 적이 없다. >---- > 요제프 멩겔레가 1977년 그의 아들 롤프에게 보낸 글에서 ---- * '''긍정적인 증언''' > 어떻게 멩겔레가 단독으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 실제로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냈다... 그가 했다고 비난하는 행위를 멩겔레는 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을 사람과 죽을 사람을 선별하기 위해 그곳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가 그 일을 하지 않았을까? >---- > 에발트 크루크 > 멩겔레에 대해 내가 처음 받은 인상은 예의 바르고 외모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는데, 그는 내게 존칭을 쓰며 앉기를 권했다. >---- > 베라 알렉산더, 아우슈비츠 수용자 간호사 > 내가 아우슈비츠에서 알게 되었던 모든 친위대원들 중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독립적인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다만 명령을 받는 사람들일 뿐이었는데, 그들은 아우슈비츠에서 민족과 조국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며 이를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 > 한스 뮌히, 아우슈비츠의 의사. 1947년에 무죄 판결로 석방되었다. > 그는 종종 매우 어려운 조건에서도 그에게 부여된 모든 임무를 신중하고, 끈기있게, 열과 성을 다하여 그의 상관이 확실히 만족할 수 있도록 수행해 냈으며, 모든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그는 인류학자로서 짧은 근무 외 시간을 활용하여 자신을 계발하는 데 열성이었으며, 업무를 보면서도 자신이 업무상 다룰 수 있는 학문적인 자료들을 이용해서 인류학 분야에 가치 있는 기여를 했다. >---- > 에두아르츠 비르츠, 아우슈비츠 주둔지 의사. [[호르스트 슈만]], 멩겔레와 함께 생체실험을 했다. > 그가 이런 일들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를 확신한다. 그가 뭔가를 했다면,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나는 멩겔레를 인간적인 사람으로만 생각했고, 인간으로서 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겸손하고 매우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 > 베르너 슈비우스, 멩겔레의 지인 > 그는 진짜 친구였다. 내가 슬플 때면 그는 내게 "왜 그렇게 슬퍼 보이냐?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말 좀 해봐!"라고 물었다. 그는 나뿐만 아니라 내게 일어나는 일에도 관심을 보여준 사람이었다. >---- > 엘자 올리베이라, 멩겔레의 가정부이자 연인 > 그의 야심이 그를 망쳐 놓았다. 나는 요제프 멩겔레를 매우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양심적이고, 매우 매력적이고, 세련되고, 재미있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 > 이레네, 멩겔레의 첫 번째 부인 > 나는 그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생각한다. >---- > 요제프 쾰러, 아우슈비츠 수용소 구역 최고 연장자 > 우리 수용소에는 발육부진 쌍둥이를 포함해 100명에서 120명 정도의 쌍둥이가 있었다. 멩겔레는 우리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는 신체적으로 우리를 학대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검사했고, 우리는 여러 가지 움직임을 취해야 했다. 그의 조수들이 다른 검사들을 했었고 멩겔레는 우리에게 주사를 놓지 않았다. >---- >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중 한 사람 ---- * '''그가 저지른 악행에 대한 증언''' > 내 아버지 요제프 멩겔레는 내게 있어 언제나 동부전선에서 전사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교양 있는 사람으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정통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아우슈비츠의 의사로 드러났다. 이런 사실이 내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요제프 멩겔레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그렇게 좋은 건 아니었다. > 그는 훌륭한 전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무궁한 가능성들이 놓여 있었다. 특히 그가 이런 가능성들을 놓쳐버린 것이 내게는 무척 가슴 아프다. 그는 자신의 삶을 내팽개쳐 버렸다. >---- > 롤프 멩겔레, 요제프 멩겔레의 아들 > 이 이송 작업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비르케나우의 화물 전용 플랫폼에 멩겔레가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고, 그가 "쌍둥이들 나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가 화물 전용 플랫폼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쌍둥이를 찾고 있을 때면, 그는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보였다. >---- > 마티나 푸취나, 아우슈비츠 수용자 의사 > 화물 전용 플랫폼에서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어떤 아리아를 조용히 휘파람으로 불고 있었다. 그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이 오른쪽과 왼쪽 또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리키며 선별 작업을 하고 있었다. > 그는 친절한 수용소 의사였다. 그 당시에 나는 그의 본래 정체를 알지 못했다. >---- > 베라 알렉산더, 아우슈비츠 수용자 간호사 > 그는 내가 지금껏 만났던 사람들 중에 가장 철면피였다. >---- > 엘라 링엔스, 아우슈비츠 수용자 의사 > 일주일에 2번 내지 3번, 그들은 우리를 병원 건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6시간에서 8시간까지 발가벗고 서 있어야만 했고, 지속적으로 측정이 이루어졌다. >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를 묘지에 묻고, 다시 그를 찾아 기리곤 한다. 하지만 미리암과 내게는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모든 쌍둥이들에게는 그런 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어머니, 아버지, 형제들을 보았던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만이 있을 뿐이다. >---- > 에바와 미리암 모제스,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 나는 1쌍의 쌍둥이를 기억하는데, 그들은 한 방울의 피도 더 이상 뽑아낼 수 없을 때까지 피를 뽑아내야 했다. 그들은 빈 비닐봉지나 맥주병처럼 땅바닥에 쓰러졌다. >---- > 이츠하크와 체라흐 타우브,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 첫 번째 조사는 눈, 키, 코와 같은 신체 외부를 비교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 검사는 여러 시간이 걸리기도 했고 여러 날이 걸리기도 했다. 나중에 우리는 수혈을 받으러 갔는데, 이를 통해서 한 쌍둥이의 피가 다른 쌍둥이의 피로 대체되었다. >---- > 일로나 락스,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 멩겔레 박사가 왔다. 그는 흰색 가운을 입었지만, 나는 그 안의 친위대 제복과 장화를 보았다. 그는 내게 사탕을 선물하고 나서 주사를 놓았다. 주사는 엄청나게 아팠다. 멩겔레는 독일어로 "걱정하지 말라"고 내게 말했다. > 나는 단지 내 몸 안에 무엇을 집어넣었는지 알고 싶었다. 내게 독극물이 주입되었다. 오늘날까지도 그게 어떤 독극물인지 모른다. 실험의 후유증으로 내 몸의 3분의 2에 장애가 생겼다. 내 몸은 떨고 있다. 나는 간질로 인해 발작을 일으키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삶인가! >---- > 모셰 오퍼,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 우리가 멩겔레의 실험대에 매여 있을 때, 다음에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등 뒤에서 차가운 솔길과 청진기가 닿는 것을 느꼈고, 그러고 나서 지독히 아픈 주사를 맞았다. 우리는 엄청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 > 칼만 브라운,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 그 당시에 우리는 사형 선고를 언도 받은 사람들이었지만, 곧장 사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우리를 곧바로 죽이는 대신에, 오늘날 실험실에서 고양이와 쥐를 가지고 하듯이, 우리를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 > 메나셰 로린치, 아우슈비츠 쌍둥이 > 우리 쌍둥이 형제는 어머니와 같이 독가스실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 때 갑자기 어머니가 "얘들아, 어서 독일인들에게로 돌아가거라. 그들이 쌍둥이를 찾고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 어머니와 막냇동생이 시체 소각장으로 계속 걸어가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몸을 돌려 화물 전용 기차 플랫폼으로 뛰어갔다. 그곳에 멩겔레 박사가 서 있었다. >---- > 에바 쿠파스, 아우슈비츠 수용소 쌍둥이 > 수용자복을 입은 유대인들에게 "쌍둥이들은 나오라"고 소리치며 난쟁이와 기형인 사람들을 찾았다. 그들은 우리에게도 왔다. 내 형과 나는 쌍둥이가 아니었지만 우리는 매우 닮았다. 그들은 우리를 열에서 빼내 끌고 가면서 우리에게 "너희들은 적어도 목숨은 부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 에프라인 라이헨베르크,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희생자 > 나는 내가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느꼈다. >---- > 미리안 모제스,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 멩겔레는 개인적으로 우리를 때리지는 않았고, 단지 우리에게 실험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가 몸짓 하나로 부모, 형제, 우리 가족 모두를 그리고 친척 모두를 죽였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의 손은 수많은 피로 얼룩져 있다. >---- > 아우슈비츠의 쌍둥이 중 한 사람 > 멩겔레가 며칠 뒤에 해부대 위에 올려놓을 것을 알면서도 아주 즐거워하며 수용소의 어린아이들을, 특히 어린 소녀들을 차에 태우고 드라이브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 > 한스 뮌히, 아우슈비츠의 의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